1. 서 론
인류는 연성과 전성이 좋은 금속 구리의 성질을 개선하기 위해 합금 기술의 진화를 이루어 왔다. 더 나은 주조성, 더 높은 경도, 더 매력적인 색상을 얻기 위해 주석, 비소 및 납을 첨가하여 청동을 제작하였다. 우리나라에 청동기 문화가 유입된 것은 기원전 10세기 전후로, 청동을 사용하여 동검, 동모, 동촉 등의 무구류와 거울, 불상, 동종 등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청동 제품의 제작 시 제품의 특성에 맞는 합금 원소의 종류와 함량을 결정하는 합금 설계와 제작에 필요한 공정(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청동 무구류는 찌르거나 자르는 것이 목적이므로 높은 강도와 경도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20 wt% 내외의 주석과 5-10 wt%의 납을 첨가하여 무기를 제작한다. 정문경, 세문경과 같은 거울은 빛을 반사해야하는 특성을 지녀야 하므로 백색도가 높아야 한다[1]. 청동은 주석이 25-35 wt% 일 때 백색도가 높아지므로 주석을 많이 넣어 합금한다. 다만 주석이 많을 경우 취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유적지에서 거울은 깨져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불상과 동종의 경우, 크기에 따라 납의 함량이 달라진다. 소형의 제품에는 납의 함량이 매우 적으나 대형 제품에서는 주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납을 많이 넣는다. 이렇듯 합금 설계가 완료되면 실 제품 생산에 적용되는 제작 방법은 주조와 그 이후에 실시되는 두드림 및 각종 열처리 공정을 조합하여 결정된다. 이렇듯 합금 설계와 제작 방법 간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이것은 고대 사회가 처해있던 정치, 경제, 문화 및 지역적 특색을 반영하여 하나의 청동기 제작기술체계를 이루었을 것이다[2].
청동으로 제작하는 다양한 제품 중 식기를 빼놓을 수 없다. 청동은 내충격성이 좋고 온도의 유지가 가능하며 향균 효과가 있어 식기로 활용하기 용이하다. 청동을 소재로 한 식기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 후 1~2세기 경으로 편년되는 황해도 해주 흑교역 동쪽 출토 국자이다[3]. 이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종을 제작하면서 기술의 변화를 추구한다. 식기 중 음식을 담고 저장하는 그릇인 청동용기는 제작방법에 따라 주물유기와 방짜유기로 구분된다. 주물유기는 일반적으로 형틀에 쇳물을 부어 응고시키는 작업으로 제작된 용기를 말하며, 제작공정이 단순하고 제품의 제작에 필요한 비용이 적다[4]. 주물유기는 청동용기가 등장한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제작되어 사용되고 있다. 방짜유기는 주물 유기에 비해 공정이 복잡하다. 주조 이후 열간 단조와 열처리 공정이 추가되어 완성된 제품을 방짜유기라고 하며, 주물유기보다 제작과정이 복잡하고 합금 제작에 더 많은 비용이 들지만 합금 소요량이 절반 이하로 감소한다는 점과 기계적 성질이 향상된다는 점에서 널리 사용된다[4].
청동용기는 이처럼 현재까지 제작기술이 전해져 사용되는 제품으로, 특히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적지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제작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청동용기류는 출토 건수가 많고 시대별로 편년되어 있어 제작기술의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청동용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을 분석하여 시대별 청동용기의 합금 조성과 제조공정을 확인하고 나아가 기존 연구자료와의 재검토를 통해 청동용기 제작기술의 변화 과정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2. 연구 방법
본 연구는 유적지에서 출토된 청동용기 98점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미세조직 관찰과 합금 조성 분석을 통해 제작기술을 확인하고자 했다. 먼저 청동용기 98점을 시대별, 출토지별로 구분하여 그림 1에 정리했다. 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된 청동용기는 48점으로, 경주 왕경지구, 황룡사지와 월성해자에서 24점,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에서 15점, 완도 청해진 유적에서 9점이 출토되었다. 고려시대의 청동용기는 22점이며 경주 망덕사지에서 7점,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에서 7점, 광주 쌍촌동 주거지에서 출토된 3점 등을 포함한다. 조선시대로 편년되는 청동용기는 14점이다. 경주 손곡동과 물천리 유적에서 7점, 오창 송대리 및 양청리 유적에서 4점 등이 출토되었다. 경주 분황사와 황룡사지,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청동용기 14점은 교란층에서 출토되는 등, 제작시대가 명확하지 않아 시대 미상의 것으로 분류하였다. 분석에 앞서 분류된 청동용기 시편을 세척한 다음 에폭시 수지로 마운팅하여 SiC 연마포(#1,200-#4,000)와 광택천 등으로 연마했다. 연마한 시편을 초음파세척기로 세척하여 건조한 후 염화철 부식액(FeCl3+HCl+H2O)으로 에칭했다. 가공과 처리를 확인하기 위한 미세조직 관찰에 광학현미경(Optical Microscope; Carl Zeiss, Axiotech 100HD, DEU)과 주사전자현미경(Scanning Electron Microscope; JSM-IT300LV, Jeol, JPN)을 사용했다. 합금 조성과 조직별 성분 분석은 주사전자현미경에 부착된 에너지분광분석기(Energy Dispersive Spectroscopy; X-MAX 7, Oxford, UK)를 이용했다. 시대별로 대표적인 시편을 선택하여 X-선 회절분석기(X-Ray Diffraction; Empyrean, Malvern PANalytical, NLD)를 이용, Cu target으로 40 kV, 40 mA의 조건에서 1/8 및 1/16의 슬릿을 사용하여 비파괴 방법으로 5~90° 범위에서 scan speed를 0.017°로 하여 상분석하였다. 또한 합금 원소와 합금비에 따른 청동의 색차 분석을 위해 재현 시편을 제작하였다. 제작된 재현 시편의 색차 분석은 분광 광도계(Spectrophotomete; Xrite, US/SP62, USA)를 이용하여 표준 광원 D65, 시야각 10°, 분석 면적 14 mm로 측정했으며 CIE L* a* b* 값으로 나타냈다. L*은 명도로 0~100까지 표시되며, 값이 클수록 백색, 낮을수록 흑색에 가까운 것을 의미한다. 채도를 나타내는 a*와 b*는 +a*가 적색, -a* 는 녹색, +b*가 황색, -b*가 청색을 나타낸다.
3. 연구 결과
성분 분석 결과, 청동용기 98점은 Cu-Sn의 이원계 합금 또는 Cu-Sn-Pb의 삼원계 합금으로 구분된다. 시대별 청동 용기의 Sn/Cu와 Pb/Cu 값의 평균을 도시한 결과는 그림 2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청동용기는 낮은 Pb/Cu의 값을 보여 대부분 Cu-Sn의 이원계 합금 소재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Sn/Cu의 값이 제일 크고 Pb/Cu의 값이 점차 증가하는 것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의 경우 Sn/Cu의 값이 낮고 Pb/Cu의 값이 약 0.8로 가장 큰 것으로 미루어 Cu-Sn-Pb의 삼원계 합금의 사용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Pb는 청동의 용융점을 낮추고 주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첨가하며[5] Pb가 2 wt% 이상 검출될 때 인위적으로 첨가하였다고 판단한다. Sn의 함량은 통일신라시대 청동용기의 경우 최소 9.1 wt%에서 최대 29.9 wt%까지 확인되며 고려시대 청동용기의 Sn 함량은 평균 21.7 wt%이며 표준편차는 4.3을 보인다. 조선시대 청동용기에 포함된 Sn의 값은 최소 7.5 wt%이며 최대 31.8 wt%로, 산포도가 8.9를 나타낸다. 이를 통해 Sn의 함량이 가장 불균일한 시대는 조선시대이며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동용기의 Sn 함량이 가장 균일함을 알 수 있다.
고대 청동의 제작에 사용된 합금의 종류와 제작방법은 유물의 미세조직을 관찰함으로써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2]. 이를 위해서는 Cu-Sn 및 Cu-Sn-Pb 상태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림 3의 Cu-Sn 상태도는 평형상 태도가 아닌 열처리 시 적용할 수 있는 준평형 상태도이다. Sn의 함량이 10 wt%를 넘지 않는 합금에서는 주조 이후 냉각과정을 통해 α상만 관찰된다. 그러나 Sn의 함량이 약 12 wt%까지 증가하게 되면 은백색의 δ상이 출현하여 α상과 공존하다가 Sn의 함량이 32 wt%에 이르면 δ 단일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취성이 강한 δ상의 출현을 억제하고자 열처리를 수행하는데 이로 인해 다양한 미세조직이 관찰된다. 주조 이후 담금질을 수행할 경우 열처리 온도에 따라 존재하는 상이 달라진다. 586-798°C의 온도 범위에서는 β상이 β(M)상으로 변태하며 520-586°C에서 γ상은 상변태를 하지 않고 고온에서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Cu-Sn-Pb 상태도는 Cu-Sn의 상태도과 동일하나 Pb가 용해되지 않고 편석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
청동용기의 미세조직 관찰을 통해 시대별 제조공정의 변화를 확인하고자 광학현미경 사진을 그림 4~6에 정리하였다. 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되는 경주 왕경지구 및 완도 청해진 유적 출토 청동용기에서는 주로 dendrite형태의 α상과 열처리 조직인 γ상 또는 β(M)상이 관찰된다(그림 4). 그림 4의 a에서 관찰되는 γ상에서 Sn이 25.7 wt% 검출되었으며 그림 4의 b의 바탕조직인 γ상에는 26.3 wt%의 Sn이 확인된다. 그림 4의 c는 Cu가 89.4 wt% 포함된 dendrite형태의 α상과 24.2 wt%의 Sn이 포함된 침상의 β(M)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경주 왕경지구 출토 청동용기는 Cu-Sn의 이원계 합금 소재로 제작되었으며 주조를 통해 용기의 형태를 만든 후 서냉 또는 담금질을 하여 공정을 완료했음을 알 수 있다. 담금질의 온도는 γ상이 출현하는 520-586°C 또는 β(M)상이 생성되는 798-586°C이었을 것이다.
완도 청해진 유적 출토 청동용기에서는 다양한 미세조직이 확인된다. 그림 4의 d에서는 Sn이 27.8 wt% 포함된 α+δ상의 공석조직과 재결정화된 α상이 확인된다. 그림 4의 e는 Sn이 20.7 wt% 포함된 Cu-Sn 합금의 미세조직으로, dendrite 형태의 α상과 26.1 wt%의 Sn이 포함된 α+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4의 f는 dendrite형태의 α상이 관찰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α+δ상의 공석조직이 분해된 것과 같은 형상을 보인다. 이는 As의 첨가로 인한 것으로, EDS를 이용한 면 분석 결과, Sn 20.6 wt%, Pb 2.9 wt%, As 2.4 wt%가 검출되어 Cu-Sn-Pb-As 합금임을 알 수 있다(그림 5의 a). 특히 그림 5의 c의 화살표에서 Sn 24.8 wt%, Pb 4.4 wt% 및 As 4.0 wt%가 확인되었다. 완도 청해진 유적에서 출토된 9점의 청동용기에서 As가 최소 0.25 wt%에서 최대 2.40 wt%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As의 첨가는 구리의 기계적 특성을 개선하기 위함이라고 하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As의 함량은 청동의 경도와 관련 없으며 오히려 청동의 취성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8-9]고 알려져 있다. 또한 출토 청동용기의 As 함량이 일관적이지 않은 것을 보아 인위적 첨가가 아닌 불순물로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As는 친동원소로, 황과 화학적 친화력이 높으며 구리의 원광석 내 납, 아연 등과 수반되어 존재한다[10]. As의 존재는 그 당시의 구리 제련 기술의 수준을 나타내며, 이는 청동용기 내 포함된 Sb와 Ag의 함량을 통해 서도 알 수 있다[11].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 김해 대청고분 및 경주 망덕사지 출토 청동용기의 미세조직을 그림 6에 나타냈다.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에서는 총 7점의 청동용기가 출토되었으며 1점을 제외한 6점이 Cu-Sn의 이원계 합금이었다. Cu-Sn의 합금 소재로 제작된 청동용기의 미세조직은 그림 6의 a와 같이 침상의 β(M)상과 구형의 α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α상 결정립 내에서 쌍정이 관찰된다. Cu-Sn 이원계 합금에서 Sn 함량은 23.4-24.2 wt%로, 일관된 함량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Pb가 17.7 wt% 포함된 삼원계 합금 소재를 이용한 청동용기의 미세조직은 α상의 바탕조직과 열처리 조직인 γ상, 원형의 Pb 편석물로 구성되어 있다. Pb 편석은 구형의 형태로, 크기가 가변적이다. Pb 함량이 낮은 청동에서는 편석이 잘 분포되어 있으나 Pb 함량이 높은 청동에서는 편석의 크기가 크고 불규칙하다. Pb 편석의 크기와 균질성은 냉각속도에 따라 달라지며 편석의 존재로 인해 미세조직의 불균질함을 야기하기 때문에 청동의 기계적 특성을 감소시킨다[12]. 또한 γ상의 확인을 통해 520-586°C 사이에서 열처리했음을 알 수 있는데 Pb의 함량이 증가할수록 취성이 강한 δ상이 증가하므로 이를 방지하고자 내충격성과 인성이 좋은 담금질 조직인 γ상을 생성시킨 것으로 판단된다[13]. 단양 현곡리 고려고분에서 출토된 청동용기는 Cu-Sn 이원계 또는 Cu-Sn-Pb의 삼원계 합금 소재로 제작했으며 이원계 합금의 경우 주조 이후 열간 단조와 열처리 공정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Pb가 인위적으로 포함된 삼원계 합금의 경우, 일부는 주조 이후 담금질하여 공정을 마무리 했다.
김해 대청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용기 1점은 Sn이 23.7 wt% 포함된 이원계 청동으로, 어둡게 보이는 γ상의 바탕조직과 dendrite상의 α상이 길게 분포하고 있다(그림 6의 c). γ상에서 Sn이 27.3 wt% 검출되었으며 이러한 γ상의 바탕조직에서 미세한 α상이 석출된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러한 조직은 martensite상을 뜨임(tempering)처리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2]. 따라서 청동발은 600 °C 이상에서 담금질 처리한 후 다시 520-586°C의 온도구간으로 가열한 후 서냉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망덕사지에서 출토된 7점의 청동용기 중 정병을 포함한 2점은 Cu-Sn-Pb의 삼원계 합금으로 제작했으며 나머지 5점은 Cu-Sn의 이원계 소재를 사용하였다. 삼원계 합금으로 제작된 청동용기는 α상의 바탕조직에 α상과 δ상이 혼합된 공석조직과 Pb 편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그림 6의 d) 이원계 합금 소재를 사용한 청동용기는 침상의 β(M)상의 바탕조직에 Cu의 함량이 높은 α상이 분포하고 있는 미세조직을 보인다(그림 6의 e, f). 경주 망덕사지 출토 청동용기 역시 Sn이 23.0-23.6 wt% 포함된 이원계 청동 소재를 이용, 가공성을 높이기 위해 열간 단조하였으며 이후 취성이 강한 δ상의 출현을 막기 위해 586°C 이상의 온도로 달군 후 담금질한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 손곡동과 물천리 유적, 오창 송대리와 양청리 유적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청동용기의 미세조직은 그림 7과 같다. 경주 손곡동과 물천리 유적에서 출토된 7점의 청동용기는 Cu-Sn-Pb의 삼원계와 Cu-Sn의 이원계로 구분된다. Cu-Sn-Pb의 삼원계 합금에서는 dendrite형태의 α상이 확인되며 미세한 α+δ상의 공석조직과 Pb 편석이 관찰된다(그림 7의 a). Cu-Sn의 이원계 합금으로 제작된 청동용기의 미세조직에서는 쌍정이 관찰되는 α 결정립과 침상의 β(M)상이 확인된다(그림 7의 b). 삼원계 합금에서의 Pb 함량은 최소 6.1 wt%에서 최대 14.4 wt%이며 이원계 합금에서의 Sn 함량은 최소 23.3 wt%에서 최대 31.8 wt%이나, 부식으로 인해 Sn의 함량이 높게 검출된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 손곡동와 물천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용기 3점은 Cu-Sn-Pb의 삼원계 합금을 이용, 주조 이후 서냉하여 제작했으며 Cu-Sn의 이원계 합금을 이용한 청동용기 4점은 주조 이후 열간 단조와 담금질의 제조공정을 거쳐 생산을 완료했다.
오창 송대리와 양청리 유적에서 청동합 4점이 출토되었다. 2점은 Cu-Sn-Pb의 삼원계이며 2점은 Cu-Sn의 이원계 합금이다. Cu-Sn 이원계 합금으로 제작한 청동용기는 그림 7의 c와 같이 쌍정이 형성된 α상과 β(M)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6의 d는 Cu-Sn-Pb 삼원계 합금에 As가 5.6 wt% 포함된 청동용기이다. Cu가 81.0 wt% 포함된 갈색의 α상이 바탕조직이며 As가 33.0 wt% 검출된 황색 미세조직은 Cu-As 상태도로 미루어보아 γ상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회색의 비금속 개재물과 Pb 편석물이 관찰된다.
분석대상인 조선시대 청동용기는 대부분 Cu-Sn 이원계 합금을 이용하여 주조로 용기의 형태를 만든 다음, 열간 단조로 기물의 형태를 다듬고 담금질을 통해 고주석 청동기가 가질 수 있는 취성을 방지했다. Cu-Sn-Pb의 삼원계 합금은 Pb 편석으로 인해 단조 공정이 불가능하므로 주조 이후 서냉하여 공정을 완료했다.
앞서 유적지 출토 청동용기 98점의 미세조직 관찰과 성분 분석을 통해 제작기술을 확인하였다. 시대별 제작기술의 변화를 검증하기 위해 기존 청동용기 연구자료를 추가한 295점의 합금 조성과 미세조직을 재검토하였다. 재검토 대상 청동용기는 경주 왕경지구, 황룡사지, 분황사 등 경북 지역 81점, 김해 구산동 유적 등 경남지역 45점, 고양 더부골 고분군 등 경기지역 46점,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과 서천 옥북리 유적 등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45점을 포함한다[14-23]. 강원지역의 1점은 강릉 굴산사지에서 출토된 청동용기로, 고려시대로 추정된다[24]. 그 외 청주 사뇌사지 등 충북지역 37점, 익산 미륵사지 등 전북지역 8점, 대구 달성 본리리 고분군 출토 청동용기 5점, 광주 쌍촌동 고분군 4점, 완주 청해진 유적 9점, 대전 가오동유적 등 4점이 있다[25-32](그림 9). 청동용기 295점을 시대로 구분하였을 때 조선시대로 편년되는 것이 109점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85점, 고려시대 81점, 시대미상의 청동용기가 20점이었다.
청동용기 295점은 Cu-Sn의 이원계 또는 Cu-Sn-Pb 삼원계 합금으로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된 청동용기는 고려 및 조선시대에 비해 Pb가 적게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로 가면서 Pb가 첨가된 기종이 증가하여 최대 30.0 wt%의 Pb가 첨가된 용기가 확인된다(그림 10).
청동용기 295점의 합금 조성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시대별로 우세한 합금 조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그림 11). 통일신라시대 청동용기 85점 중 85.9%가 Cu-Sn의 이원계 합금 소재를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81점 중 55점이 Cu-Sn 이원계 합금으로 제작되었으며 Cu-Sn-Pb의 합금으로 제작된 것은 32.1%인 26점에 불과했다. 조선시대에는 Cu-Sn-Pb 삼원계 합금의 이용 건 수가 증가한다. 총 109점 중 47.7%인 52점이 Cu-Sn-Pb 삼원계로 확인되어 합금 조성이 Cu-Sn에서 Cu-Sn-Pb로 변화함을 알 수 있다. Pb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합금의 용융점을 낮추고 주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첨가하나 Pb 편석이 생성되어 기계적 성질을 약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b를 첨가했던 이유에 대해 추정해보면 Pb는 Sn에 비해 값이 싸고 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Pb의 인위적 첨가에 대해서는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청동용기의 사용 예가 드물었으며 왕궁지 및 사지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지배계층에서 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청동용기는 고려시대부터 사용이 급증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널리 유행하게 된다. 이로 인해 청동용기의 제작이 증가하게 되었으며 제작에 필요한 원료의 공급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에 동의 생산과 이용이 가장 활발했으며 당시 그 명성이 ‘고려동’이라는 명칭으로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다[33].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거듭되는 전란과 광석의 무분별한 채굴 등으로 구리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구리의 채굴과 제련 기술의 부족으로 일본에서 구리를 수입한다. 주석 또한 고려시대에는 송에서, 조선시대에는 일본에서 수입했다. 납의 원광석인 방연석은 우리나라에서도 풍부하게 산출되며『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납 광산으로는 황해도 서흥·평산·해주·풍천·봉산·문화·수안, 평안도 태천·가산·성천·은천·은산·곡산·강계·함흥·초산, 함경도 단천·영흥, 강원도 금성·안변, 경기도 금천, 경상도 김해·창원·대구·안동·춘양·안강·사천·청하·경주, 충청도 서산·충주가 있다[34]. 따라서 수입에 의존했던 Sn 보다 쉽게 구할 수 있었던 Pb를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는 용기의 색상과 관련이 있다. 청동용기는 대부분 분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매납의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는 백색을 숭상하는 시기로, 부장품의 선택 시 백색이 갖는 의미를 고려했을 것이라 생각된다[35]. 청동은 Sn의 함량이 증가할수록 백색도가 증가하는데 이는 Sn 함량이 낮은 적황색의 α상에 비해 Sn 함량과 백색도가 높은 δ상이 증가했기 때문이다[36]. Sn과 유사하게 백색의 색상을 낼 수 있는 것이 Pb이다.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고자 순수한 Cu와 Cu와 Sn을 무게비로 90:10으로 합금한 시편 그리고 Cu, Sn, Pb를 80:10:10으로 합금한 시편의 색도를 측정한 결과, Cu-Sn 이원계 합금은 백색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L*값이 73.29였으며 a*, b*의 값은 8.95, 23.29였다. Cu-Sn-Pb의 삼원계 합금의 L*값은 72.60, a*값은 7.71, b*값은 23.04였다(표 1). 이를 통해 Pb의 첨가가 백색도에 영향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시대별로 우세한 청동용기의 미세조직을 확인하고자 했다(그림 12). 295점 중 미세조직이 확인되는 시편은 총 251점이다. 통일신라시대 청동용기의 미세조직은 다양하게 우세한 것이 확인된다. 주조 이후 담금질을 통해 생성되는 dendrite형태의 α상과 β(M)상 또는 α상과 γ상으로 구성된 청동용기가 47점이었으며 열간 단조로 인해 α결정립 내 쌍정이 생성된 α상과 β(M)상은 4점, 주조 이후 서냉 공정으로 제작된 용기가 24점이었다. 고려시대에는 α상과 β(M)상으로 구성된 청동용기가 45점으로 우세하다. 또한 α상 내에 쌍정이 있어 열간 단조 공정이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서는 열간 단조와 담금질 공정으로 생성된 α상과 β(M)상으로 구성된 청동용기가 42점, 주조 이후 서냉으로 공정을 마무리하여 α상과 α+δ상으로 이루어진 용기가 40점 확인된다. 이는 합금 조성과도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Cu-Sn-Pb의 삼원계 합금의 사용이 증가하게 된다. Pb의 용융점은 327°C로, 청동용기의 열간 단조는 400°C 이상에서 실시하게 되어 내부로 Pb가 녹아 배출되어 형태 변화 등을 초래한다[13]. 따라서 Cu-Sn-Pb 삼원계 합금으로 제작한 청동용기는 열간 단조 공정을 수행하지 않고 주조와 서냉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시대별 합금 조성과 미세조직을 바탕으로 청동용기의 제작기술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합금 조성과 제조공정에 따라 다양한 미세조직이 관찰되었으며 이는 시대별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통일신라시대는 청동을 이용해 완, 합, 발 등의 용기를 제작하는 시기로, Cu-Sn 이원계 합금을 이용하여 주조로 용기의 형태를 제작하고 서냉 또는 열처리를 통해 공정을 마무리 했다. 이 때 Sn 함량은 20 wt% 이상으로, 열처리를 하지 않으면 취성이 강한 δ상이 생성되므로 담금질을 통해 γ상 또는 β(M)상을 출현시켰다. 고려시대는 용기의 사용이 증가하여 본격적으로 제작하는 시기로, 기형의 두께를 조절하기 위해 열간 단조 공정을 추가한다. Cu-Sn 이원계 합금을 사용하여 주조-열간 단-담금질의 공정순서로 제작하거나 Cu-Sn-Pb의 삼원계 합금으로 주조로 용기의 형태를 만들고 서냉하였다. Cu-Sn-Pb의 삼원계 합금의 사용은 고려시대부터 증가하여 조선시대에는 주를 이룬다. 값비싼 금속인 Sn 대신 Pb를 첨가한 것으로, 이로 인해 α상과 α+δ상으로 구성된 청동용기가 많아진다.
4. 결 론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용기 98점을 대상으로 성분을 분석하고 미세조직을 관찰하여 시대별 합금 조성과 제조공정의 변화에 대해 확인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통일신라시대 청동용기는 주로 Sn이 20~26 wt% 포함된 Cu-Sn 이원계 합금을 이용하여 주조 이후 서냉하여 제작하였다. 완도 청해진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용기에서는 As가 불순물로 검출되어 As를 포함된 원료 광석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2. 고려시대 청동용기 22점 중 19점은 Cu-Sn 이원계 합금으로 제작했으며 3점은 Cu-Sn-Pb 합금을 사용했다. Cu-Sn 이원계 합금의 경우 Sn의 함량이 20-24 wt%였으며 쌍정이 형성된 α상과 β(M)상이 확인되어 주조-열간 단조-담금질의 공정을 거쳐 용기를 제작하였다. Pb가 첨가된 삼원계 합금의 청동용기에서 γ상이 관찰되어 520-586°C에서 담금질 처리했음을 확인하였다.
3. 조선시대 청동용기는 대부분 Cu-Sn 이원계 합금을 이용하여 주조로 용기의 형태를 만든 다음, 열간 단조로 기물의 형태를 다듬고 담금질을 통해 취성이 강한 δ상의 생성을 방지하여 내충격성을 증가시켰다. Cu-Sn-Pb의 삼원계 합금은 Pb 편석으로 인해 단조 공정이 불가능하므로 주조 이후 서냉하였다.
4. 청동용기의 시대별 제작기술의 변화를 확인하고자 기존 연구자료를 포함하여 총 295점의 합금 조성과 미세조직을 검토한 결과, 시대별로 우세한 제작기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통일신라시대는 Cu-Sn 이원계 합금을 이용하여 주조로 용기의 형태를 제작하고 서냉 또는 열처리를 통해 공정을 마무리 했다. 고려시대는 본격적으로 청동용기를 제작하는 시기로, Cu-Sn 이원계 합금을 사용하여 주조-열간 단조-담금질의 공정순서로 제작하거나 Cu-Sn-Pb의 삼원계 합금으로 주조로 용기의 형태를 만들고 서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Cu-Sn-Pb의 삼원계 합금의 사용이 증가한다.
청동용기는 주조와 서냉으로 공정을 마무리하는 주물유기에서 Sn 함량 22 wt% 부근의 Cu-Sn 합금을 이용, 700°C 근처의 고온에서 가해지는 두드림 작업과 담금질처리로 구성되는 방짜유기로 기술이 변화한다. 청동용기 제작기술은 발전되는 것이 아닌,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변화함을 확인하였다.